가야금의 명인이자 작곡가로 잘 알려진 황교수가 국악과 만난 것은 너무나도 운명적이었습니다. 3대 독자로 태어난 그가 우연히 가야금의 소리에 반하여 가야금을 배우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모님께서는 펄쩍 뛰며 말리셨습니다. 가야금을 배우는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공부에 큰 지장이 된다는 것이 말리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하자 그의 부모님도 가야금 배우는 것을 허락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대학생활은 전공과는 다른 것을 하며 남다른 인생을 사는 청년으로 젊은 날을 보냈습니다. 남들은 사법고시를 보거나 행정고시를 보아 출세하려고 애를 쓸 때 그는 가야금과 함께 졸업하여 서울대 국악과 강사로 삶을 꾸려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서울대 법대에서 법률을 전공했지만 취미로 배운 가야금 실력이 뛰어났고 취미가 가야금을 타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교수로 취임한 이래 본격적인 국악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법과대학을 나와 판검사 안 하고 왜 가야금이나 메고 다니냐는 소릴 수도 없이 들었지요. 그럴 때마다 저는 우리 전통 음악을 제대로 분별해 내는 음악 판검사가 되겠노라고 거듭 다짐했습니다. 비록 음악인이 되었지만 법대에 다닌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음악학도에게 중요한 것은 음표의 단순한 해설보다는 그 음악을 어떻게 이해하느가였기 때문에 법학 공부가 음악 공부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 라고 말하는 황교수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였기 때문인지 얼굴에는 웃음이 그치지를 않습니다. 그는 연주 여행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구미 각 국을 몇 차례 순방했고, 현직 대학교수로도 한국 음악의 세계화를 위해 쉴새 없이 뛰고 있습니다.
‘올해 국악의 해를 맞아 국악의 대중화를 외치는 사람이 무척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국악의 대중화는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국악을 뜯어고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생활 속에 뿌리 내려 생활화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국악의 대중화입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국악을 세계화하는 것도 섣불리 변형시킬 일이 아니라 우리 국악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세계에 알리고 소개하는 것이 세계화입니다.' 고 말하는 그가 '국악의 해' 조직위원장으로서 관심 있게 추진할 목표는 겉치레만 번드르르한 행사 위주가 아닌 생활 속에 뿌리내린 '국악의 생활화'입니다. 올해 자연히 알게 된 국악의 바람과 열기가 식지 않도록 부채질하고 국민의 생활 속으로 깊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힘쓸 것입니다. 그는 국악인으로서 우리 국민들이 겨레의 혼과 숨결이 깃든 국악의 풍부한 정서 속에서 생활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