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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明成皇后)의 생애 및 역사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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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노턴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생애 및 역사적 평가 


1. 간략정보

시대- 조선
생몰년- 1851-1895(철종2-고종32)
본관 -여흥(驪興)


시호
활동분야 - 비
다른 이름 - 민비(閔妃)


2. 명성황후의 간택과정

여덟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으로 자랐다.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천거로 왕비로 간택되어 1866년(고종 3) 한 살 아래인 고종의 비로 입궁하였다.
명성황후가 왕비로 간택된 것은 외척에 의하여 국정이 농단된 3대(순조·헌종·철종) 60여 년간의 세도정치의 폐단에 비추어 외척이 적은 민부대부인(閔府大夫人)의 집안에서 왕비를 들여 왕실과 정권의 안정을 도모한 흥선대원군의 배려에 의해서였다.


3. 흥선대원군간의 갈등

소녀시절부터 집안일을 돌보는 틈틈이 《춘추 春秋》를 읽을 정도로 총명했으며, 수완이 능란한 그녀는 수년 후부터 곧 왕실정치에 관여하여 흥선대원군의 희망과는 달리 일생을 두고 시아버지와 며느리 간의 정치적 대립으로 각기 불행을 겪어야만 했다.
명성황후와 대원군 사이가 갈라진 것은 궁녀 이씨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 완화군(完和君)에 대한 대원군의 편애와 세자책립 공작 때문이라 하나, 그 배후에는 민씨를 중심으로 한 노론(老論)의 세력과 새로 들어온 남인(南人)과 일부 북인(北人)을 중심으로 한 세력간의 정치적 갈등이 작용했다.
명성황후는 갖은 방법으로 흥선대원군을 정계에서 물러나도록 공작하여 마침내 대원군의 정적(政敵:趙成夏를 중심으로 한 趙大妃 세력, 趙斗淳·李裕元 등 노대신 세력, 金炳國을 중심으로 한 안동김씨 세력, 대원군의 장자 載冕과 형 李最應 세력 및 崔益鉉 등 유림세력)과 결탁하고, 최익현의 대원군 규탄 상소를 계기로 흥선대원군을 하야하게끔 하여 양주(楊州) 곧은골[直谷]에 은퇴시켰다.


4. 명성황후의 정권장악과 친정외교

대원군의 실각 후, 민씨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고 고종을 움직여 근대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고 일련의 개화시책을 승인했다.
1882년 민씨 정부의 정책에 불평을 품어온 위정척사파와 대원군 세력이 봉량미(俸糧米) 문제로 폭동을 일으킨 구군인(舊軍人)의 세력을 업고 쿠데타를 감행하자, 명성황후는 재빨리 궁중을 탈출하여 충주목(忠州牧) 민응식(閔應植)의 집에 피신하였다.
이곳에서 비밀리에 국왕과 연락하는 한편, 청국에 군사적 개입을 요청하여 청국군을 출동하게 하고 일시 정권을 장악했던 흥선대원군을 청국으로 납치하게 하였으며, 다시 민씨세력이 집권하도록 암약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명성황후는 친청사대(親淸事大)로 흐르게 되어 개화파(開化派)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1884년 급진개화파의 갑신정변이 일어나 잠시 개화당 정부에 정권을 빼앗겼으나 곧 청국세력의 도움으로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때부터 명성황후는 왕궁에서 외교적 국면에 매우 민첩하게 대응하며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1885년에 거문도사건(巨文島事件)이 일어나자 묄렌도르프(Mo"llendorf, P. G.)를 일본에 파견하여 영국과 사태수습을 협상하면서 한편으로는 러시아와도 접촉하게 하였고, 또한 청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흥선대원군의 환국을 묵인하면서 유연성 있는 접촉을 유지하였다.


5. 명성황후시해 - 을미사변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조선의 정국이 얽혔을 때 조선에 적극적인 침략공세를 펴게 된 일본은 갑오경장에 간여하면서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명성황후 세력을 거세하려고 공작하였다. 명성황후는 일본의 야심을 간파하고 일본이 미는 개화세력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한반도에 진주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조선 정계에 적극 압력을 가하게 되자, 사세가 불리해진 명성황후는 친러정책을 내세워 노골적으로 일본 세력에 대항하였다. 삼국간섭(三國干涉)으로 일본의 대륙침략의 기세가 꺾이게 되자, 조선 정계의 친러 경향은 더욱 굳어졌다.
이에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는 일본의 한반도침략정책에 정면 대결하는 명성황후와 그 척족 및 친러 세력을 일소하고자 일부 친일정객과 짜고, 1895년 8월에 일본군대와 정치낭인(政治浪人)들이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왕궁을 습격하고 명성황후를 시해한 뒤 정권을 탈취하는 을미사변의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명성황후는 나이 45세로 일본인의 손에 살해되고 시체가 불살라지는 불행한 최후를 마쳤다.
이때의 정부는 친일정책을 펴 폐비조칙(廢妃詔勅)을 내렸다. 10월 10일 복위되어 태원전(泰元殿)에 빈전을 설치하고 숭릉(崇陵) 우강에 능호를 숙릉(肅陵)이라 하여 국장을 준비하였다.
그후 1897년 명성황후(明成皇后)로 추책되고 난 뒤 11월 양주 천장산(天藏山) 아래 국장되어 홍릉(洪陵)이라 하였다. 1919년 고종이 죽자 2월 미금시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었다.


6. 명성황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

명성 황후에 대한 평가는 20여 년에 걸친 그의 집권기에 시행된 정책과 그 결과를 바탕으로 냉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명성황후를 정점으로 하는 민씨 일족이 집권한 1873년부터 1895년까지는 우리 나라로서는 정말 중요한 시기였다. 밀려드는 서양 열강, 뿌리부터 흔들리 는 봉건체제, 새로운 변화를 구하는 움직임, 이런 다양한 세력들이 얽히고 설키면서 임오군 란 , 갑신정변, 동학농민 운동 같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대원군의 정책이 '쇄국'이었던 반면에 명성황후의 대응책은 '문호개방'이었다. 명성황후는 1876년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규)을 시작으로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과 차례로 수교를 맺었다. 명성황후에게 서양 열강과의 수교를 적극 권한 장본인은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이다. 조선에서 청의 기득권을 지키고 서양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의 독주를 막으려는 생각에서였다. 오랑캐로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청의 이른 바 '이이제이'정책이다.
  어찌되었든 문호개방을 한 조선의 당면 과제는 자주적인 근대화를 이루는 일이었다. 서양 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과 산업 진흥을 꾀하는 동시에 낡은 봉건제도를 허물고 새로운 질서를 세워야 했다. 명성황후와 민씨 정권은 이 중 어느 것 하나도 충실히 해내지 못 했다. 그 결과 어느 세력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개화 반대를 외치며 임오군란에 참가한 군 중은 명성황후를 공격의 표적으로 삼았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도, 동학농민군도 모두 명성황후와 민씨 일족 타도를 외쳤다. 어느 쪽의 지지도 받지 못한 명성황후는 외세에 의지 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명성황후로 하여금 재집권케 해준 것은 청나라였다. 동학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청에 지원군을 청하여 일본군 상륙의 빌미를 제공하고 그 결과 우리 땅에서 청일 전쟁이 벌어지게 한 장본인은 바로 명성황후였다.
청일 전쟁이 우리 땅에서 벌어지게 된 이유는 동학농민 운동 때문이 아니라 명성황후가 이끄는 민씨 정권의 부패와 무능, 외세의존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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