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와 상품
우리는 한국전쟁 이후,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었음에도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대의 트라우마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이면서 지금은 손에 넣을 수 없지만 미래의 영구한 자산이 될 무형의 '가치' 보다,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으며 당장 팔아 식량을 조달할 수 있는 '상품' 그 자체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아직 우리의 마음속에는 먹고살기 힘들었던 시기 속에 갇혀있는게 아닐까?
무형의 가치덩어리, 교육
무형의 가치로 이루어진 것들을 찾아보자면, 모든 유초중등교육 및 대학교육, 각 분야의 연구개발, 기초학문, 문화예술 등이 있다. 당장 결과를 얻을 수 없고, 눈으로 볼 수 없으며, 미래에 대한 확실한 보장도 없다. 하지만, 지금의 성장을 이끌어 낸 원동력 또한 이 무형의 가치들이었다. 교육 영역에 한정지어 생각해 보자.
가장 큰 걸림돌
유초중등교육의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을 하나 꼽으라면, 대학입학시험 위주의 교육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등급, 순위, 경쟁, 선행, 학원, 비용, 격차, 차별 등의 키워드는 오로지 대학입시를 위해 달려가고 있는 학교교육이 발생시키는 부산물로도 볼 수 있다.
가난의 트라우마, 대학입학
대학입시위주의 교육이 문제라고 이구동성으로 지적하지만,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반세기 동안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있을까? 앞서 다룬 가치와 상품 중에서 우리는 가난의 트라우마를 이기지 못한 우리를 돌아보면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그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당장 거래할 수 있는 상품을 선택하고 있을 뿐이다. 유초중등교육의 결과물로 눈에 드러나는 대표적인 상품이 바로 대학입학이고, 이런 확실한 상품 이외에 펼쳐진 미지의 수많은 가치를 선택했을 때 우리는 굶어죽을 걱정이 앞서게 된다. 그 공포심에 벌벌 떨며 대대손손 학생과 자녀를 대학입학시험의 준비라는 명분으로 등떠밀고 있으면서, 미래교육을 논의하고 멋진 신세계에 대한 환상적인 메아리만 만들어낼 뿐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않는 사회
이런 현실에서 교육을 통해 지식습득과 탐구, 철학적 질의와 문답, 토의와 토론, 협력과 소통, 도전과 성취의 즐거움을 느끼며 성장하는 모든 행위들이야말로 당장 눈에 보이지도 않고, 미래에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확실하지도 않다. 이런 모든 가치들은 꾸준히 익어갈 시간도 필요하고, 기다려 줄 여유, 동료 사이의 친분과 신뢰, 교사의 전문성과 학교의 안전 등 보이지 않는 양분이 필요하지만, 오로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재정'을 투입해서 '당장'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결실을 맺어야 한다는 조바심이 양분조차도 급한 마음에 손으러 퍼 나르다가 바람에 흩날려 버린다.
PTSD에 갇혀버린 우리 사회
우리는 언제쯤 후유증을 극복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 구글과 오픈AI, 엔비디아, 테슬라 같은 고부가가치 산업이 언제 쯤 뿌리내릴 수 있을까.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시기는 언제쯤 도래할까. 대입이라는 당장의 상품성을 추구하기 위해 좁은 시야를 강요받은 세대들이, 넓은 안목으로 고 부가가치를 찾아낼 수 있게 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다음 세대들에게 너희만큼은 두려움을 이겨내고 너만의 가치를 찾으라 하다보면, 사회 전체가 저 불쌍함에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이 시점을 어떻게 타개해 나가야 할까.
PTSD를 악화시키는 교육계급
이 문제는 관점에 따라 논쟁의 여지가 있겠으나, 호수에 돌을 던져보자는 못된 심산일 뿐이니 마음쓰지는 말자. 세기 초부터 해외의 다양한 교수법과 사조가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이런 의미있는 이론과 실천이 우리교육의 성장에 큰 도움과 영향을 주었다는데 이의는 없다. 다만, 게중 오래 전 부터 시도되고 있는 몇몇 사례에 대한 우려인데, 대개 루틴은 이렇다. 특정 국가의 우리와 다른 교육이론과 수업을 들여와 일부 학교와 교실에서 선보이며, 마치 이런 수업은 매우 선진적이고 특별한 기회를 가진 학생들만 경험할 수 있고, 수업을 받은 학생들이 성장하여 미래의 중요한 인물로 성장할 것이라는 일종의 교육비즈니스 모델이 우려스럽다. 이런 형태의 교육비즈니스가 자리잡지 못하고 사라지고 또다시 새로운 비즈니스가 등장하는 까닭이, 국가교육과정과의 격차로 통합하지 못하는 일반화의 난제라기 보다는 새로운 교육계급을 만들어서 다른 학생들보다 우월한 교육을 받았다는 엘리트 주의자를 만들어 내려는 목적은 아닐지 의심스럽다. 결과적으로, 지역사회 뿐만아니라 미디어를 통해 접한 다른 부모들에게 조바심과 열등감을 증폭시키고, 새롭게 등장한 계급을 이겨내기 위해 대학입시에 매달리도록 채찍질하는 악순환을 일으키고 있지는 않은지 과장된 상상도 해본다.
공동체 전체가 극복해야
옛 사람들로부터 교육은 백년지대계라 하였다. 중국 우주과학의 발전과 최근 Deepseek을 통해 그 말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깨달아야 한다. 우리와 달리 중국은 오래 전부터 기초 학문과 문학, 예술을 교육의 중요 목표로 설정해왔다. 달에 가기 위해 좋은 대학을 나와 큰 회사에 취직하면 이루어지는게 아니라, 달을 바라보고 상상하며 그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나가는 풍부한 스펙트럼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맺어진 결실이 몇 개 나왔을 뿐이다. 시간은 흐르고, 인구는 줄어들고, 격차는 급격히 벌어질 수 밖에 없다. 혁신가가 등장하여 갈아 엎거나, 전략가가 등장하여 바로잡기는 어렵다. 모든 공동체가 공감하며 안정적인 교육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수 밖에 없다. 먹고살기 힘들수록 우리의 부모가 교육만큼은 믿고 맡겼고, 무능무식무도하지 않은 리더와 교육전문가를 풍부하게 갖춘 정부가 앞장서서 흔들림없이 백년지대계를 수립해 나가야 한다.
뭐, 반세기 동안 우리 선배들이 주장한 뻔한 결론이다. 나라고 별 수 있겠나. 먹고살기 어렵던 시절의 PTSD를 원인으로 보았을 때, 이런 방향에서 극복할 묘안을 찾아보자 정도로 마무리 하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