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로그인

아이디
비밀번호
ID/PW 찾기
아직 회원이 아니신가요? 회원가입 하기

중국정부가 바라보는 조선족과 조선족 정책

Profile
:맥노턴

http://moyiza.net/bbs/bbs.php?id=kc_discuss&no=51중국정부가 바라보는 조선족과 조선족 정책

이 진영 (경희대학교 국제관계학)


I. 문제제기

이 번 공청회는 기존의 재외동포법에 대한 개정의 필요성에서 출발하고 있다. 또한 본인에게 부과된 주제는 과연 중국 정부가 보는 조선족 문제는 무엇이고, 실제로 중국 정부의 입장이 한국의 재외동포법 개정 과정 중 소위 조선족 부분과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지 하는 부분이다.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기본적인 입장에서 충돌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충돌은 중국 정부의 독특한 입장이 반영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어떤 부분에서 충돌이 일어나는 것인가?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단순하게 국적 개념에서 출발하고 있는가? 즉, 조선족은 중국 공민이고 그러므로 중국 공민에 대한 한국 정부의 정책은 내정간섭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인가? 본인이 주장하는 점은 이러한 중국 공민에 대한 국적 개념은 사실상 중국 정부의 외양에 불과하고, 기본적인 문제점은 새롭게 정의된 중화민족에 기초한 중국의 민족 개념과 소수민족 정책과 연관되어 제기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중국의 정치-사회적인 기본적인 틀과 연관된 문제라고 하는 점이다. 여기서 밝히고 싶은 것은 중국 정부가 생각하는 방향이 이러하다는 점이지 그것이 옳다거나 혹은 본인의 의견이 중국 정부의 의견과 동일하다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민족문제를 보는데는 여러 혼란이 있어 우리가 종종 그 속에서 길을 잃곤 한다. 이런 혼란은 기본적으로 중국 공산당과 중국정부가 바라보는 민족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대 표적인 혼란의 예는 지금 이 공청회에서도 쓰는 '조선족'이라는 호칭이다. 조선족이란 중국 정부의 민족 개념에서 나온 것으로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흡사 이것은 "자랑스런 동이(東夷)의 후손(동쪽 오랑캐의 후손)"이라는 표현과 같이 이제는 아무 의식없이 받아들여져서 하나의 범주를 형성하고 있다.

또 하나의 혼란은 중국의 발표된 정책 기조와 실제 정책의 차이를 혼동하는 것이다. 가령, 중국의 민족정책은 관용적이며 소수민족에게는 특별우대 정책을 쓰고 있고 그러한 예로 두 자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중국 정부의 정책에서도 관용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역사의 시기에 구체적인 장소에서 실시된 정책의 많은 부분은 관용적이지 않다. 중앙에서의 선언과 일부 시기와 장소에서 실시된 단발성, 모델 정책으로 전체 정책을 평가하는 오류를 범하면 안된다.

마지막으로는 대내문제의 국제화, 혹은 외교 이슈화이다. 중국은 역사를 잘 기억하는 나라이다. 중국인의 기억에는 이번 만주사변 70주년(지난 9월 18일)이 여전히 살아 있다. 또한, 일본은 영사문제 특히 재만 조선인의 위치를 둘러싸고 중국의 민국정부와 지리한 .외교적인 싸움을 하였다. 그러므로 영사문제는 중국인에게는 국민당이건 공산당이건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이다. 우리나라에서 영사 문제가 부차적으로 취급되고 전문화되지 않은 것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즉, 한국적인 판단으로 중국의 국내문제를 판단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II. 중국 정부의 정책의 기조를 보는 주요 이슈

그렇다면 중국 정부의 대 조선족 정책을 보는데 있어 고려해야할 주제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1) 독특한 그리고 새롭게 창조된 중화민족 개념,
2) 그 중화민족에 기초한 중국의 정치-사회 변화와 정책에의 투영,
3) 중국 민족정책과 조선족 정책의 관계,
4) 한-중 수교후 변화와 중국 정부의 태도의 측면에서 접근하려 한다.


1. 독특한 그리고 새롭게 창조된 중화민족 개념

중 국 정부의 조선족 정책을 보는데 있어 제일 중요한 요소는 중국 공산당이 새롭게 규정한 중화민족의 개념이다. "중화민족은 한족(漢族)을 주체로 하고 55개 소수민족을 포괄하는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민족이다. 학문적으로, 근대 서구 국민국가 형성에 있어서 민족주의는 주요한 역할을 하였고, 그러한 민족주의를 통해 형성된 국민의 통합이 국민국가의 기초가 되고 있다. 중화민족은 이러한 국민국가 형성과정에서 새롭게 창조된 개념이다. 이것은 흡사 British가 English를 중심으로 Welsh, Scottish, Irish 일부가 포함된 것과 유사하다. 우리가 영국인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British이다.

중 국에서는 이러한 관념을 독특하게 구체화하여 그것을 계서적 개념으로 만들었다. 즉, 중화민족에 해당하는 것을 ren(人)으로, 중화민족의 구성요소는 zu(族)으로 개념화 한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인은 족의 상위 개념이다. 즉,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인은 이제 한족이라 불린다. 중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이제 더 이상 조선인도 한국인도 아니다. 그들은 중화민족의 일원인 것이다. 영어로 번역도 Chinese nation(중국인, 중화민족), Han nationality(漢族)으로 달리하고 있다.

여 기에서 중요한 점은 이러한 '인'의 개념이 단순하게 국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민족의 개념을 포괄하는 것이다. 즉, 일반 민족을 넘어서는 상위 민족 개념에 중화민족이 있는 것이다. 독특하다고도 할 수 있고, 자기 중심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관념이 우리의 '동포'라는 개념과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중국측이 재외동포 특례법에 대해 "재외 동포의 범위를 포괄적으로 규정"하였다고 항의한다면, 중국 역시 중화민족의 범위를 그것보다 더 넓게 규정하고 있는 셈이다.즉, 중국은 민족의 개념을 국적 개념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많은 조선족은 자신을 중국인 혹은 중화민족이라 한다. 그리고, 조선족이라 한다. 이것은 49년이래 78년 개혁 개방전까지 30여년간 고립된 채로 진행된 중국의 민족정책의 현실인 것이다. 모든 것은 이러한 민족과 국적이 혼재되고 새롭게 규정된 중화민족의 개념에서 출발한다. 티벳 문제의 근원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조선족 문제도 예외가 아니다.


2. 중화민족주의에 기초한 정치-사회의 변화

중국의 독특한 민족관념과 함께 그것의 구체적 실천인 민족 정책은 이 관념을 현실로 구체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중국의 민족 정책, 특히 소수민족과 연관하여 주요하게 나타난 표현은
1) 다원일체(多元一體),
2) 단기적 공존 장기적 융합,
3) 큰 것은 틀어쥐고 작은 것은 놓는다는 방침이다.
또한, 이러한 방침은 중화민족주의라고 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다 원일체란 중국은 다민족 사회이고, 다양한 인종적 배경과 지역적 특색이 있으며, 공산화 이전에는 그 정치-사회-경제적 다양성이 존재하였는데, 이러한 다원성을 일부 인정하는 토대에서 일체화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다원을 어디까지 인정하는가 하는 점이다.

단기적 공존 장기적 융합이란 말 그대로, 한족과 소수민족이 공존하는 현실에서 단기적으로는 공존하나 장기적 목표는 중화민족으로의 융합이라는 것이다.
중국에서 동화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거기에는 주종관계(주류사회에의 동화)가 있다는 것이다. 융합은 상호작용으로, 한족도 소수민족의 관습 등에 동화될 수 있다는 논리에서 출발하고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물론 어려운 얘기이다.
중 국은 이러한 관념에 근거하여 역사도 재해석(왜곡)하고 있다. 민족관계사의 영역으로 분류되는 연구에서 이제 더 이상 이민족이 중원을 침략하였다는 표현은 쓰지 않는다. 중화민족의 일원인 하나의 민족과 다른 민족과의 내전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또한, 이민족의 왕조는 중국의 역사적인 지방정권으로 불려지고 있다. 발해와 고구려가 그 예이다. 단기적으로, 역사적으로 존재했을지라도, 그 구성원인 민족은 이제 중화민족으로 융합되거나, 그 일원으로 남아있으므로 그들의 정권은 중국의 지방 정권이라는 것이다.

큰 것은 틀어쥐고 작은 것은 놓는다는 방침은 우리가 중국 소수민족 정책의 관용성을 종종 발견하여 착각하는 부분이다. 즉, 작은 것은 놓는 다는데서 관용성의 여지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이 큰 것이고 무엇이 작은 것인가 하는 점이 논쟁거리라 할 수 있다.

위의 3가지 요소는 중화민족주의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다. 중화민족주의란 중국이 서구와 일본의 침탈 그리고 전근대적 요소와의 투쟁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중화민족주의의 요소 중 "영토적 일체성과 국민적 통합"이 가장 주요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영토적 일체성이란 중국정부가 영토문제에 대해서 단호하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홍콩이나 대만문제에 집착하는 중국 정부의 입장에서 이를 알 수 있다. 또한, "티벳은 분리될 수 없는 중국의 일부분" 이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국민적 통합은 민족정책과 연관하여 더욱 중요한 요소이다. 위에서 설명한대로 사실상의 "주체민족인 한족으로의 동화"가 목표인 셈이며, 이는 기본적으로는 장기간의 과제이나, 정책의 측면에서는 부침을 겪으면서 실현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은 행정제도, 교육, 언어에서의 정책에서 나타난다.

큰 것은 틀어쥐고 작은 것은 놓는다는 것과 연관된 것은 소수민족의 정치적 민족주의와 문화적 민족주의를 구별하여 대처한다는 것이다. 즉, 위에서 정한 가이드라인이라 할 수 있는 일체적 요소는 소수민족이 침범할 수 없는 요소이다. 다원적인 것은 문화적인 면에서만 허용된다. 중국정부의 영토나 민족관념은 불가침이나, 언어나 풍습 등은 보호되고 때로는 장려된다.

우리는 연변에서 한국어가 쓰여진 간판을 보고 중국의 민족 정책을 본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문제도 단순하게 문화적인 요소가 아닌 정치화 할 경우 중국 정부는 단호하게 대처하였다.

1957 년의 민족어 순결논쟁과 이후 연결된 반우파 투쟁은 좋은 예이다. 또한, 중국의 민족 정책은 '구역자치' 라는 개념에서 출발하고 있다. 구역자치란 소수민족의 다원성을 인정하면서도 중국의 일체성을 놓치지 않으려는 정책이다. 구 소련이 민족공화국 정책을 사용하여 후에 분열하는데 빌미가 되었다면, 구역자치제는 소련보다 더욱 통제된 그리고 분리될 수 없는 행정개념이다. 이것은, 형식적인 자치이며, 주로 문화적 영역에서의 자치라 할 수 있는 것이다.


3. 중국정부의 기본적인 대 조선족 정책 노선

중 국정부의 조선족에 대한 정책에서 제일 먼저 고려해야 할 점은 위에 열거한 중국의 민족정책의 큰 틀과 소수민족 정책의 틀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족만을 위한 정책이 존재한다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이는 중국의 민족정책의 큰 틀을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중국의 조선족에 대한 정책은 크게 나누어 세 시기로 정리할 수 있다. 그것은
1) 중화민족의 일원으로의 편입 (1945-1957),
2) 중화민족으로의 동화과정(1957-1992),
3) 제 3 아이덴티티의 형성과정 (1992- )으로 설명할 수 있다.
1 기와 3기는 조선족 문제가 단순한 국내문제가 아닌 국제문제의 시기이며, 그 파트너는 1기에서는 북한, 3기에서는 북한과 남한이다. 우리의 주 관심시기는 3기이나 이 시기에 나타나는 문제는 이미 나머지 두 시기에 배태되어 있는 것이다.

1) 중화민족의 일원으로의 편입 (1945-1957)
이 시기는 조선족에 대한 개념 규정이 나타나는 시기이자 법률적으로 국적문제가 중요한 이슈가 될 수 있는 시기이다.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의 국적 변동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 관한 법령이나 지침이 정해졌다면 그 내용은 무엇이고 적용 범위는 어느 정도인가 하는 점은 아직도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런 혼란이 기본적으로 종식되는 것은 1957년임이 분명하다.
중국의 한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역인 간도지역(현 연변)과 그 주변의 목단강 연선의 경우 이미 1946년 초에는 공산당이 실제적으로 장악한 지역이다. 공산당은 3차례에 걸친 토지개혁을 통해 이 지역의 행정권을 장악했고 그 결과 한인의 호구를 파악하고 있었다. 파악된 한인들 중 6만 5천명 정도의 장정이 중국의 국공내전에 동원되고 있다. 행정-징세-군 동원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 시기의 중국 공산당은 연변에서 실제적인 정부 형태를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영사문제도 북한의 인민위원회와 일부 협의한 흔적이 있다. 하지만 1948년 북한정권이 성립하고 1949년 중국이 성립하기까지 양측의 업무처리는 지침에 의존하되 많은 예외가 있었던 것 같다. 많은 한인들은 거의 자유롭게 양국을 왕래하였다. 물론 허가증이 필요하여 당국이 발행하기도 하였으나, 기본적으로 북한으로 돌아가는데는 제약이 없었다. 1948년 12월에 열린 "조선민족문제에 대한 간담회"는 과도기적인 이 시기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위 연안파라 할 수 있는 중국공산당 지도하의 주 덕해를 비롯한 미래의 조선족 지도자들은 민족구역자치내에서 중국소수민족으로의 조선족을 위치시키고, 당시 행정전원(총책임)이었던 임춘추를 비롯한 김일성 계열은 해방전의 약속대로 간도를 조선(북한)에 귀속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러한 논쟁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당시 중국 공산당의 승리가 확실시되는 시점에서, 조선족에 대한 문제를 확정하려는 공산당의 입장이 드러나는 것이지만, 동시에 여전히 혼란스런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예외적이라 할 수 있는 여러 조치들은 특수사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일반적이었던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다. 중국의 국공내전에 동원된 6만5천명의 조선족이 1949년 12월 어느날 갑자기 정주에 모여 북한으로 들어가 인민군 3개 사단으로 편제된 것이나, 한국전쟁 기간과 그 후에 북한의 복구사업에 많은 조선족이 참여한 사실 등은 그 당시의 특수사항을 반영한다. 문제는 이들 중 많은 이들이 북한에 잔류하여 북한 정부나 당에서 일하였고, 또한 일부는 원하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고 중국 정부도 이를 용인했다는 것이다. 사실상의 이중국적의 상황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적 형제애라고 하기에는 특수한 중국과 북한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957년 중국정부가 지역적 개념을 사용하여, 산해관 이북의 한인을 조선족으로, 산해관 이남의 한인과 이후 중국에 들어온자를 조교(조선교포)로 분류하기까지 특수한 상황은 유지된 것이다.
이에 반해, 중화민족 개념에 의한 조선족으로의 논리적 작업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소위 중국의 토착민족이 아닌 한인을 중화민족의 일원으로 개념화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민족이론이 발전하였고 민족정책의 시행에 있어서 모델이 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전국적 범위에서 형성된 개념과 정책이 조선족 지역에서 시행되는데는 위의 경우에서 보듯이 특수한 사정이 고려되었으나, 조선족 정책이 중국 민족정책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45-49년 사이의 공산당의 선언과 문건에는 중국의 한인을 표현하는 여러 용어가 혼재하고 있는 상황이며 이는 최종적으로 조선족으로 정리되는 것이다.
민족구역 자치에 의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탄생도 이와 행적을 같이 한다. 물론, 내몽고가 형식적으로 먼저 자치구가 되었으나 연변이 자치구 설정이 늦어진 것은 순전히 한국전쟁의 영향이다. 1952년 성립한 자치구(주)는 중국의 통일적인 입장이 강조된 것으로 역사적인 간도의 영토 할양 요구에 대한 해결로써 성격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2) 중화민족으로의 동화과정 (1957-1978)
영 토와 정치적 형태에 대한 문제가 일단락 되자 중국 정부가 취한 행동은 중화민족주의에서 중요한 국민적 통합과정의 실천이었다. 1957년 이후 즉, 1954년 중국의 헌법이 반포되고 짧은 2년간의 황금기가 지난 후, 중국은 정치적 동원이 특징인 시기로 접어들게 된다. 이 시기 조선족 정책에서 중요한 것은 이런 정치적 동원을 통해서 중국의 한인이 실제적으로 중화민족의 일원인 조선족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이다. 북한과의 관계는 중소분쟁의 여파나 북한의 8월 종파사건의 영향과 중국내의 반우파 투쟁으로 인하여 이제는 하나의 외국으로 북한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내의 한인은 북한과 구별되는 중국인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것을 강요받게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반우파 투쟁과 지방민족주의(조선족의 민족주의) 투쟁에서 나타난 다중 조국관은 이런 고민을 잘 나타내고 있다. 다중 조국관이란 중국내의 한인에게 여러 조국 혹은 모국이 있다는 것으로, 사회주의모국인 소련과, 이민자로써의 모국인 고국(故國) 한반도와 지금의 조국 중국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중국을 제외한 나머지 모국은 포기하도록 강요받았다. 심지어는 고국이라는 표현도 쓰지 못하게 하였다. 이런 현상은 문화혁명(1966-76)의 초기에 더욱 심하였는데, 일체의 민족적 특색이 나타나는 표현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특히, 계급대오 정리운동기간(1968-9)에는 많은 조선족들이 이러한 민족문제로 인하여 희생되게 된다.
정치적인 민족주의가 봉쇄된 시점에서 문화적 민족주의도 제약을 받았다. 민족학교의 구성이나 수업내용, 교과과정 등에 대해서도 제약이 나타났고 이러한 소위 정치화할 소지가 큰 문화적 요소에 대한 통제는 민족언어순결론 논쟁에서 나타나고 있다. 민족언어 순결론 논쟁은 중국어의 어휘와 구조가 조선어에 침투하는 상황에서 민족어를 지키려는 노력에서 시작되었으나, 반우파 투쟁 등을 거치면서 정치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많은 참여자들이 숙청되는 계기가 된다. 즉, 조선족은 이제 중화민족의 일원으로 정치-행정-사회-문화적으로 존재할 것을 강요받은 것이며, 이러한 실제적 강요는 30여년간 지속되면서 중국의 한인을 한반도의 한인과 많이 구별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3) 제 3 아이덴티티의 형성과정 (1992- )
우리의 주된 관심은 1992년 한-중 수교후 전개된 조선족 문제라 할 수 있다. 이를 독립적인 장으로 나누어 이슈별로 살펴보기 전에 여기서는 기본적인 내용을 소개한다.
한 중수교는 중국의 조선족 정책에서 일대 전기를 맞이하는 사건이다. 한 국가의 내국화한 조선족 정책이 다시 외교 및 영사문제로 등장하게 되었고, 이는 중국의 민족정책에서 실제적으로 도전적 요소가 된 것이다. 특히, 북한과 연결된 한반도에서의 두 개의 국가의 인정은 중국이 조선족 문제를 자국내의 문제뿐 아니라 대 한반도 정책의 맥락에서 검토하게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조선족 문제가 중국의 국내 민족문제와 국외 외교문제와 중첩되게 되었다는 것으로 다시 한번 조선족 문제의 독특함이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의 소수민족중 어느 정도 정치적, 경제적으로 강성한 모국을 가진 민족은 조선족을 제외하고는 없는 실정이다. 또한, 티벳의 경우와는 달리 조선족은 이동이 상대적으로 많은 민족이고, 두 개의 모국과 연결되어 있고, 원래 토착 민족이 아닌 점도 조선족 문제의 특이한 점을 나타낸다. 하지만, 중국 정부의 반응 중, 특이하게 조선족만을 지칭하여 발표된 것은 없다. 여전히, 전체 중국의 민족 정책의 큰 테두리에서 언급되고 있다. 이는 중국 정부가 조선족 문제를 특수화하는 것보다는 자국의 일반적인 민족정책의 테두리에 유지함으로써 여전히 중화민족주의적인 민족통합의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물 론, 중국은 티벳, 위구르, 몽고, 조선족을 1994년 조국의 안정을 위협할 수 있는 불온한 민족으로 지정하였다. 사실 중국의 민족정책은 이들과 무슬림인 회족에 대한 정책이 그 근간을 이루고 있다. 나머지 소수민족은 숫자도 적고, 많더라도 중국에 거의 동화되거나 정치적인 민족주의를 분출시키는 민족들이 아니다. 또한 지역적 분포에서도 광범위하지가 않다. 오로지 위의 5개 소수민족만이 잠재적인 정치적 도전 세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회족은 회교도화한 한족이므로 민족문제라기 보다는 종교문제의 색채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4개 민족을 불온하다고 한 것은 소수민족 전체를 불온시 한 것으로 특이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거나 실제적인 조직을 가지고 움직이며 테러등의 활동을 하는 다른 민족과는 달리 조선족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중국 정부가 조선족 문제를 단순한 국내의 문제로 보지 않고 있음을 반증한다고 할 수 있다.
지난 10여년간 중국의 조선족은 한국을 방문하거나 중국을 방문한 한국인들과 교류하면서 여러 이슈에서 입장을 달리하였다. 단순하게 정리할 수 없는 이런 과정을 통하여 현재의 조선족은 한반도의 한국인과 북한인과는 구별되는 제 3의 아이덴티티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조선족의 주변부적 위치가 1기에서는 주로 북한의 중심성과 중국의 중심성이 교차하는데 있었고, 2기에서는 중국의 중심성에 흡수되도록 요구되었다면, 지금은 중국의 중심성의 기반하에 자신들의 상대적 중심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으로 보여진다. 여기에서, 조선족에 대한 중심성을 제공하고 그 편으로 이끌려는 노력은 사실상 중국의 중화민족주의와 한국민족주의가 충돌하고 경쟁하는 성격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조선족은 여기에서 새로운 제 3의 아이덴티티를 추구하는 듯이 보인다. 한국 정부와 국민이 어떤 정책을 취하는 가는 이러한 현실에 대한 판단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즉, 어느 측면에서 문제를 바라보는가 하는 시각에 따라 정책적인 차이뿐 아니라 중국내의 조선족의 아이덴티티도 영향을 받을 것이다.

4. 한인계 중국인 사회의 변화와 중국 정부의 정책
한- 중 수교후 중국 정부가 보인 태도를 고찰하면 현재의 중국 정부의 조선족 정책에 대한 기본적인 출발점을 알 수 있다. 다시 부기하지만, 대부분의 중국의 태도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이 언론보도나, 여러 사건에 대한 대처등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정부간에는 여러 형태의 의사표시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대부분의 경우는 구체적인 입장을 알 수 없다.

10여년간 중국과 조선족 관계로 발생한 이슈들을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1) 민족주의와 관계된 것,
2) 종교활동과 연결된 것,
3) 노무수출과 연결된 것,
4) 탈북자 문제와 연관된 것,
5) 경제적 관계와 연관된 것 등이다.

1) 민족주의와 관계된 것
민 족주의와 연관된 것은 일부 한국인 관광객의 중국내에서의 활동과 연관되어 있다. 백두산 천지에서 태극기를 휘두른다든지, 조선족에게 만주땅은 우리 땅이라는 발언을 한다든지 함으로써, 조선족의 정치적 민족주의를 고취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민족주의 가능성에 대해서 중국 정부는 몇 차례 한국 관광객의 중국 내에서의 활동을 자제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한다. 이 문제는 중국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영토에 대한 것으로 다른 사항과는 달리 중국 정부가 공식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초기의 경우로 최근에는 한국 쪽의 자제(?)에 따른 것인지 더 이상 발견하기 힘들다.

민족주의 고취와 연관된 두 번째의 것은 문화적인 문제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중국 동북 지역(구 만주)의 고고학적 발굴문제 및 보존에 대한 것인데, 중국 정부의 지방정권 취급을 받는 고구려와 발해 유적에 대한 공동조사는 아직도 제한받고 있는 실정이다. 보존과 관련하여서는 초기의 강경한 태도에서 탈피하여 개인적인 차원의 기부는 사안별로 허가되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인 민족주의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동질성 회복 작업으로 여겨져서, 아직까지도 공동 학술대회에서의 발표나 참가에 일정 부분 제한을 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역사 부분 그리고 민족의식과 연관된 부분에서는 예민하게 반응하는 실정이다.

민족주의 고취와 관련된 세 번째 문제는 한국의 민간단체의 조선족 돕기 운동에 대한 반응이 있다. 어떠한 형태로든 인적 네트웍의 상호구축에 대한 우려는 존재하는데, 90년대 전반기까지는 한국에서 보낸 도서 등에 대해서도 검열을 통해 역사나 문화에 관련된 서적은 사전에 제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후반기로 가면서 중국 사회 자체의 변화가 진행되고, 한국인과 조선족이 상호 네트웍을 발전시키기보다는 서로 대립하게 되면서 중국의 입장은 상당 부분 완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후반기 들어서의 완화는 조선족 사회의 변화에서 기인한 점이 크다. 즉, 다른 지역과는 달리 조금 늦게 개방된 연변지역은 90년대 전반에 들어서면서 역사와 문화를 다시 연구하게 되면서 민족문화 부흥이라는 새로운 단계를 맞게된다. 그 결과 조선족의 역사와 교육, 문화에 대한 연구 결과물이 대량으로 출판되고, 조선족의 문화적 민족주의는 최고로 고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문화민족주의는 정치적인 민족주의로 전화되지 않았고, 한국인들과의 네트웍이 형성된다든지 하는 중국 정부의 우려를 살만한 방향으로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아래의 여러 사건을 거쳐 조선족과 한국인은 분열과 반목을 노출하고 있으므로 중국 정부는 조선족에 대한 정책을 좀 더 완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조선족 사회에 급격하게 들이닥친 개방과 사회변화도 민족주의에 있어 새로운 양상을 만들었다. 조선족의 출국열과 연해지역으로의 이동은 초기에 중국 공안당국의 관심을 크게 끌었으나, 그것이 정치적인 문제로 번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구의 대량 이동은 조선족 사회 자체의 붕괴 논의로 이어질 정도로 조선족 사회가 가지고 있는 기반을 약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역설적으로 개방에 의한 중국 사회의 근대화는 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였고, 중국 정부의 정책 기조에서 큰 것은 쥐고 작은 것은 놓는 특성상 좀 더 완화적인 정책이 가능해진 것이다.

2) 종교활동과 연결된 것
오 히려, 중국 정부의 조선족 정책에서 이제 중시되는 것은 한국인 선교사들의 종교활동과 연관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다수의 선교사가 여러 형태로 중국에서 선교를 하고 있는 상태이고 이는 중국법에 의하면 불법적인 행동이다. 중국에서 종교문제는 법륜공 문제에서 보듯이 국가안보 문제와 직결된 사항이다. 특히, 종교문제는 소수민족에게 있어서는 개별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주요한 도구이므로 중국 정부는 종교사무와 민족사무를 동일시하는 형편이다. 티벳의 티벳 불교나, 회족의 이슬람교, 위구르족의 최근 이슬람원리주의 확산은 중국 정부가 한족의 법륜공만큼 중시하는 문제인 것이다. 올 4월에 중국의 종교 사무를 담당하는 고위 인사가 한국을 방문, 한국 선교단체들의 공격적 선교 행위를 자제해 줄 것을 언급한 것은 이에 대한 중국 정부의 시각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조선족과 연관된 중국 정부의 기독교 선교에 대한 정책은 기본적으로 관찰의 수준이지 다른 소수민족 처럼 탄압하는 수준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것은 선교가 조선족이나 북한을 주로 타겟으로 하고 있지만 민족의식 고취로 연결된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즉, 종교적인 목적이 강하고, 사회의 안정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는 관찰에 의존하는 것이며, 때로 사안별로 선교사의 추방 등의 조치를 하고 있는 정도이다.

3) 노무수출과 연결된 것
노무수출은 조선족의 출구논쟁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이 노무수출의 많은 부분은 조선족이 일하게 되는 사업장인 한국의 문제이지 중국의 문제는 아니다. 단지 중국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노무 송출과 관련한 중국내의 절차와 이들이 해외에서 일하게 될 때 발생하는 영사적 측면에 대한 것이 주요 관심사이다. 중국 정부의 기본 입장은 이에 대해 방기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나간 중국인들에게 보이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고 본다. 단지 틀린 점은 노무수출 초기에도 조선족 노무인력 사이에는 공산당의 활동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조선족 노동 인력이 공산당원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중국 정부의 대표체인 대사관이 조선족과 다른 중국인을 구별하여 처리한다는 말을 듣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중국내에서의 절차에 대한 것이다. 1994년 노무송출비리로 많은 조선족이 한국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할 때의 중국 정부의 태도는 송출의 책임자가 주로 중국인임에도 불구하고 방관하는 태도를 지녔고, 그것을 정부 차원보다는 민간 차원의 문제로 취급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런 중국 정부의 태도는 노무수출을 민간차원 혹은 민감하지 않은 사안으로 취급하여 방기하고 있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97년들어 사기사건 피해가 급증하자 중국 정부는 범인 색출과 사기금액 반환을 위해 한국 정부가 노력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한국 정부의 발표는 중국이 정부배상을 요구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4) 탈북자 문제와 연관된 것,
탈 북자 문제와 연관된 중국의 태도는 국제기구와의 연관된 사안의 중요성 때문에 여러 보도를 통해 다른 이슈와는 달리 잘 알려져 있는 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국 정부의 조선족에 대한 정책은 '난민이기 보다 월경자인 탈북인들을 보살피는 범법행위에 초점'을 두고 진행되고 있다. 특히, 중앙의 방침과는 무관하게 지역적 차원에서도 처리 방법이 시기에 따라서 차이가 나는데, 이 사항도 기본적으로는 외교적 사안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여기서 알 수 있다.
93년 11월12일 「길림성 변경관리조례」가 통과된 이후 97년에는 형법에「국경관리방해죄」를 신설하는 등 다른 사안보다는 신속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점이다.

5) 경제적 관계와 연관된 것
경 제적 관계와 연관된 중국 정부의 조선족 정책은 조선족 집거 지역의 경제발전과 연관된 부분이다. UNDP 주관하의 두만강개발계획은 중국 정부가 특히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도 진행되고 있으나 정치적인 이유로 그 추진은 미미한 실정이다. 그러나 계획의 초기에 중국 정부의 태도에서 보면, 실제적인 계획과 실행의 주체가 성급에서 결정되어 사실상 주 대상인 조선족과는 별개로 진행되고 있었다. 또한 이런 측면은 개발의 축에서도 나타나는데, 기존의 연길시를 중심으로 하자는 자치주의 견해와는 달리, 한족 지구 중심으로 그리고 훈춘을 새로 개발하는 축으로 변하였음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중국 정부의 태도는 조선족 지구의 발전에 있어서 어떠한 우대도 하지 않는 정책이라 할 수 있다. 한때 선진적이었던 이 지구는 지금의 중국의 변방 지역으로 개발에서 뒤쳐져 있는 상태이다. 최근 21세기 중국 정부가 가장 야심차게 추진하는 서부개발의 한 부분으로 연변 조선족 자치주가 포함되어 허가되었는데, 실제적인 투자나 특혜조치들은 확정된 것이 없는 형편이다. 중국 정부의 주동적인 정책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워도, 사실상 연해 중심의 정책의 유지와 연변자치주의 방기는 조선족의 연해로의 이동을 촉진하고, 연변을 비민족지구 즉 한족지구로 변모시키는데 일조를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5. 결어와 전망

지금까지 중국 정부의 조선족 정책을 중국 정부의 민족정책이라는 큰 틀과 조선족에 대한 정책사적 측면, 그리고 한중 수교후 몇 가지 이슈를 가지고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중국 정부의 최근의 정책은 어떻게 개념화 할 수 있는가? 본인이 생각하기에 중국 정부의 기본적인 정책은 조선족과 연관된 영사문제를 정치화하지 않기 바라는 정책이라 할 수 있고, 사실상 조선족 정책은 부분적 방기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92년 한중 수교후의 경험이
첫째, 중국내의 조선족이 정치적 민족주의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였고,
둘째, 조선족 사회가 사실상 서서히 그 기반이 붕괴되어 가고 있으며,
셋째, 한국 정부와의 관계에서도 이 사안이 남북문제에 따른 한국측의 중국에의 협조 요청 등으로 부차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 마디로 통제할 수 있는 문제라는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본다. 또한, 한국의 중국 관내에 대한 경제적 투자나 진출도 중국측에게 외교적인 지렛대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중국은 조선족 문제가 이슈화되지 않고, 그것이 다른 소수민족 문제로 번지지 않으며, 남북한 문제를 외교적 카드로 사용할 수 있는 한 적극적인 정책을 사용할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사 실, 한중관계에 있어서 조선족 문제는 한국측에서도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심양 총영사관 개설문제는 한국측에게는 그 필요성이 시급하나 중국측에게는 민족문제나 북-중관계와 연관하여 시급한 사안이 아니며, 오히려 시간을 벌 수 있는 소지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중 관계와 연관하여 한국의 정책은 좀 더 실용적인 기술적 측면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중국측이 한국의 법령에 대해 민족관념과 국적개념의 충돌과 국제적인 관례를 들어 항의를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다른 구체적인 조치를 통해 그 항의를 피해가면서 상호 win-win 할 수 있는 방법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정책은 조선족이 원하는 방향에서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주로 입국에 관한 문제와 노동 허가 문제의 용이성이라 할 수 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조선족의 대다수는 한국에의 정주를 원하고 있지 않다고 본다. 단지 입국이 간편해지고, 노동허가를 통해 한국에서 돈을 벌어 중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우리의 노동시장의 탄력성에서도, 혈연적 의미에서도 설사 조선족의 대다수가 들어온다 할지라도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영국의 경우를 한 예로 들어보겠다. 영국은 유럽연합국가의 국민에 대한 출입국 간소화 이전에도 이미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국민에 대한 특혜 조치가 있었다. 이들 국가의 사실상 영국계 시민은 입국과 체류 그리고 노동허가에서 특혜가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주민증은 민족표기를 하고 있다. 조선족에 대한 구체적인 특혜조치가 그렇게 중국 정부나 한국 정부에게 부담이 되는 것일까?

또한, 세계화 시대라고 하는 지금 영사문제는 외교적인 역량이 잘 나타나는 영역이다. 우리는 자주 잊고 있지만 중국은 역사를 잊지 않는다는 사실과, 영사문제 즉 과거 만주의 조선인이 중-일 관계에서의 항상 분쟁의 주요 요소였고 중-일 양측이 이를 항상 자신들의 정책에서 이용하고 제한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 정부는 중국 정부와 같이 민족문제에 대한 하나의 원칙을 만들고, 그것에 기초하여 적극적인 외교력을 발휘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쪽에서는 한민족 공동체이나 다른 쪽에서는 민족의 일원이 아니라고 하는 모순성은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Profile
:맥노턴
레벨 30
569308/686490
81%
McNorton & Education Lab.
Director
작성자의 다른 글
댓글
0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아이디
비밀번호
ID/PW 찾기
아직 회원이 아니신가요? 회원가입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