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5월 29일자 이시형씨의 글 중에서>
건널목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행 신호가 켜지자 사람들은 종종걸음, 8차로인데도 우리 병원 앞 신호등은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신호가 바뀐다.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한 여자아이가 눈에 띈다.
다리가 불편해 걸음이 느리다.
모두들 다 건널 즈음인데도 이 아이는 아직 중앙선을 넘지 못하고 있다.
보기에도 안쓰럽다.
그때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두 아이가 뒤늦게 건널목을 건너려고 뛰어든다.
물론 그 아이들의 걸음으로는 무사히 건너기에 문제가 없다.
한데 뒤처져 건너는 여자아이를 발견하곤 아이들이 걸음을 멈춘다.
그리곤 무슨 약속이나 한 듯 한 걸음쯤 뒤처져 여자아이를 따라간다.
그가 눈치 못채게 하려는 게 분명해 보인다.
자칫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다.
혹은 자신들의 배려에 행여 부담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아이들이 세심한 배려가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신호는 꺼졌고 다리는 불편하고, 슬슬 차가 움직이는데 얼마나 불안할까.
인간은 이런 순간 깊은 소외감, 고독감에 빠지게 된다.
이럴 때 함께 걷는다는 건 그 아이의 불편을, 아픔을 함께 나눠 갖겠다는 것이다.
중앙선을 겨우 넘자 신호가 벌써 바뀌었다.
아이들은 손을 들어 운전자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여자아이도 안간힘을 쓰는게 뒤에서 봐도 역력하다.
그 아이는 부축을 필요로 하는 것 같진 않아 보였다.
그저 느릴 뿐이었다.
거기다 오른쪽 어깨에 가방까지 흔들거리니 더 힘들어 보였다.
가방을 들어주랴, 남자아이가 조심스레 손을 내민다.
여자아이가 고개를 흔든다.
그리곤 몇걸음 옮기더니 가방을 벗어준다.
남자아이가 쑥스럽게 받아든다.
여자아이도 지금쯤 이 남자아이들이 왜 뜀박질을 멈추고 자기 옆을 '호위'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렸겠지.
이젠 외롭지도 무섭지도 않다.
그 따뜻한 배려가 고맙다.
가방을 들어주겠다는 호의도 고맙다.
그렇다고 체면없이 벗어주기엔 미안하고.
하지만 행여 남자아이가 무안해 하지나 않을까..... 이런 생각들이 바쁘게 오갔겠지.
내겐 이 장면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믿음과 사랑을 나눈 감동적인 순간이다.
아스팔트 정글, 붉은 신호를 건너고 있는 긴장의 순간, 성급한 운전자들이 차마 출발은 못하고 으르렁대는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이 아이들이 보여준 믿음과 사랑의 나눔은 한 편의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생면부지의 아이들, 그들 사이엔 한 마디 말도 없다.
하지만 거기엔 따뜻한 인정의 가교가 놓여있다.
이 아이들이 다 건너기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려준 운전자들도 고마웠다.
누구 하나 클랙슨을 울리지 않고 조용히 기다릴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했다.
그들도 이 아름다운 아이들을 지켜보면서 마음속으로 수채화를 그리고 있었겠지.
신호가 바뀌기도 전에 클랙슨을 울리며 출발하는 한국인의 운전 습관으로선 참으로 기적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사히' 건너온 사내아이들이 가방을 내민다.
여자아이가 가벼운 목례를 하고 받아든다.
그리고 서로 반대방향으로 돌아서 간다.
저만치 가던 사내아이들이 뒤돌아본다.
붐비는 차 사이로 잘 보이진 않지만 '잘가!' 하는 아이들이 소리가 들릴 듯하다.
저 아이들이 각박한 도심의 살풍경을 장미꽃 화원으로 바꾸어 놓았다.
회색빛 거리가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대단한 아이들이다.
달려가 덥석 안아주고 싶다.
택시가 내 앞에 멈춰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난 그 아이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어떤 아이들일까?
아! 요즈음 세상에도 아이를 저렇게 가르치는 부모가 있구나.
어떤 사람들일까?
그 아이들의 가정분위기까지 궁금해진다.
불과 몇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하지만 한편의 아름다운 영화를 본듯 황홀했다.
난 그날 오후 내낸 이 생각으로 흐믓하고 즐거웠다.
요즈음 아이들!
말만 들어도 우린 혀를 차고 고개를 내젓는다.
하지만 주위엔 아름다운 아이들도 많다.
그게 안 보인다면 '요즈음 어른들' 모습은 어떤지 우리 자신을 되돌아봐야 한다.
건널목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행 신호가 켜지자 사람들은 종종걸음, 8차로인데도 우리 병원 앞 신호등은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신호가 바뀐다.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한 여자아이가 눈에 띈다.
다리가 불편해 걸음이 느리다.
모두들 다 건널 즈음인데도 이 아이는 아직 중앙선을 넘지 못하고 있다.
보기에도 안쓰럽다.
그때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두 아이가 뒤늦게 건널목을 건너려고 뛰어든다.
물론 그 아이들의 걸음으로는 무사히 건너기에 문제가 없다.
한데 뒤처져 건너는 여자아이를 발견하곤 아이들이 걸음을 멈춘다.
그리곤 무슨 약속이나 한 듯 한 걸음쯤 뒤처져 여자아이를 따라간다.
그가 눈치 못채게 하려는 게 분명해 보인다.
자칫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다.
혹은 자신들의 배려에 행여 부담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아이들이 세심한 배려가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신호는 꺼졌고 다리는 불편하고, 슬슬 차가 움직이는데 얼마나 불안할까.
인간은 이런 순간 깊은 소외감, 고독감에 빠지게 된다.
이럴 때 함께 걷는다는 건 그 아이의 불편을, 아픔을 함께 나눠 갖겠다는 것이다.
중앙선을 겨우 넘자 신호가 벌써 바뀌었다.
아이들은 손을 들어 운전자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여자아이도 안간힘을 쓰는게 뒤에서 봐도 역력하다.
그 아이는 부축을 필요로 하는 것 같진 않아 보였다.
그저 느릴 뿐이었다.
거기다 오른쪽 어깨에 가방까지 흔들거리니 더 힘들어 보였다.
가방을 들어주랴, 남자아이가 조심스레 손을 내민다.
여자아이가 고개를 흔든다.
그리곤 몇걸음 옮기더니 가방을 벗어준다.
남자아이가 쑥스럽게 받아든다.
여자아이도 지금쯤 이 남자아이들이 왜 뜀박질을 멈추고 자기 옆을 '호위'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렸겠지.
이젠 외롭지도 무섭지도 않다.
그 따뜻한 배려가 고맙다.
가방을 들어주겠다는 호의도 고맙다.
그렇다고 체면없이 벗어주기엔 미안하고.
하지만 행여 남자아이가 무안해 하지나 않을까..... 이런 생각들이 바쁘게 오갔겠지.
내겐 이 장면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믿음과 사랑을 나눈 감동적인 순간이다.
아스팔트 정글, 붉은 신호를 건너고 있는 긴장의 순간, 성급한 운전자들이 차마 출발은 못하고 으르렁대는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이 아이들이 보여준 믿음과 사랑의 나눔은 한 편의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생면부지의 아이들, 그들 사이엔 한 마디 말도 없다.
하지만 거기엔 따뜻한 인정의 가교가 놓여있다.
이 아이들이 다 건너기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려준 운전자들도 고마웠다.
누구 하나 클랙슨을 울리지 않고 조용히 기다릴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했다.
그들도 이 아름다운 아이들을 지켜보면서 마음속으로 수채화를 그리고 있었겠지.
신호가 바뀌기도 전에 클랙슨을 울리며 출발하는 한국인의 운전 습관으로선 참으로 기적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사히' 건너온 사내아이들이 가방을 내민다.
여자아이가 가벼운 목례를 하고 받아든다.
그리고 서로 반대방향으로 돌아서 간다.
저만치 가던 사내아이들이 뒤돌아본다.
붐비는 차 사이로 잘 보이진 않지만 '잘가!' 하는 아이들이 소리가 들릴 듯하다.
저 아이들이 각박한 도심의 살풍경을 장미꽃 화원으로 바꾸어 놓았다.
회색빛 거리가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대단한 아이들이다.
달려가 덥석 안아주고 싶다.
택시가 내 앞에 멈춰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난 그 아이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어떤 아이들일까?
아! 요즈음 세상에도 아이를 저렇게 가르치는 부모가 있구나.
어떤 사람들일까?
그 아이들의 가정분위기까지 궁금해진다.
불과 몇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하지만 한편의 아름다운 영화를 본듯 황홀했다.
난 그날 오후 내낸 이 생각으로 흐믓하고 즐거웠다.
요즈음 아이들!
말만 들어도 우린 혀를 차고 고개를 내젓는다.
하지만 주위엔 아름다운 아이들도 많다.
그게 안 보인다면 '요즈음 어른들' 모습은 어떤지 우리 자신을 되돌아봐야 한다.